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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3.21 고려대학교 대나무숲 21909번째 포효 [A-2]

#21909번째 포효 

 

​저도 길게 적고 싶은데, 글재주가 없어 그러지 못해서 미안해요.

한동안 SNS를 끊고 살았었어요. 근데 며칠 전에 동생이 이거 너 아니냐, 라고 웃으면서 뭘 보여주더라구요.

긴 글이었고, 재미있는 글이라고 생각했고, 뭔가 익숙했어요.

잘생기지 않은 외모, 하늘색 모자, 꾸벅, 카페모카.

 

어쩌면 김치국일지도 몰라요. 옆에서 호들갑 떠니까 저도 모르게 이것저것 썰어넣고 보글보글 끓이는.

그래서 사실 엄청 망설였어요. 민망한 일이 생길까봐. 

 

근데 제가 자주 다니던, 그 카페에 계셨던 분이 적은 글일까봐, 민망함을 무릅쓰고 제보 보내요.

제보가 처음이라 약관...?같이 긴 부분들을 읽어봤는데, 여러가지 면에서 사람을 찾는 듯한 뉘앙스는 안되는 것 같더라구요.

그렇다고 실명을 밝히기엔(제가 생각하는 분과 맞는 분이든 아니든)제가 너무 민망할 것 같구요.

그래서 익명으로나마 짧은 답장을 보내고 싶어요. 

익숙치 않아서 규칙에 위배되는 부분이 있다면 올라가지 않겠지만, 일단 적어보내봐요.

 

저는 그 브랜드의 카페를 좋아해요. 친숙한 느낌이거든요! 커피를 잘 몰라서 달달한 것만 골라서 마셔요.

그러다가 정착한 게 카페 모카예요. 초코 많이 넣어주신 거 정말 감사했습니다. 실제로 속이 너무 쓰려서 두 잔 마신 거였어요.

제가 거의 첫손님으로 찾아가는 느낌이라, 그냥 혹시나 제가 귀찮게 하는 부분이 있을까봐 조심스러웠어요.

실제로 조금 피곤해 보이시기도 했구요.

 

영화는 그냥 아무거나 전부 봤어요.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하거든요.

읽던 책은 '13계단'이라는 다카노 가즈아키의 소설이에요. 근처 중고 매장에서 샀어요.

그리고 걱정..?해주신 대로 밥을 잘 안먹었어요 그때는. 귀찮아서 그냥 아침에 커피 한 잔,점시에 커피 두 잔. 

보신 대로 잘생기진 않았고, 약간 소심한 것 같네요. 그래서 친절한 인사에 제대로 대꾸하지 못했고, 조금 큰 종소리에도 죄송하다고 했어요.

 

그리고 오늘 밤 비행기를 타요. 유럽으로 한 달이 조금 안되게 여행을 가거든요. 

고등학교부터 대학교, 군대까지 너무 쉬지 않고 달린 것 같아서 여유를 가져보고 싶었어요.

하필이면 이런 타이밍에 가네요. 될 사람은 된다더니, 전 안 될 사람인가 싶기도 하고. 

사실 서글서글한 눈웃음이, 커피를 건낼 때 조금씩 스치던 손이, 씩씩하면서 상냥한 목소리가 너무 좋았어요.

근데 보시다시피 제가 적극적이지 못한 탓에. 그리고 조금 더 사실은 '어떻게 나 같은 애가 저런 분을'이라는 생각까지 했어요.

 

민망하고 쑥스럽고 미안해서. 그리고 고마워요. 좋게 봐주셔서.

이 다음에 적을말은 지울까 말까를 정말 한참을 고민했는데, 이왕 쓴 거 그냥 적어서 보낼게요.

 

10월 마지막 주에, 저는 내내 그 카페에서 있을 생각이에요.

운이 좋다면 이 글을 보실테고, 조금 더 운이 따라준다면 아직 제가 밀려갈 수 있겠죠.

카페모카 말고, 좋아하시는 커피 사드리고 싶어요. 

여름의 끝자락에서 절 기다리셨듯이, 이번에는 제가 기다릴게요. 겨울의 초입새에서.

Posted by 노꼴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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